미술관에 가면 괜히 조금 긴장하게 된다.
작품 앞에서는 충분히 오래 서 있어야 할 것 같고, 벽에 적힌 설명을 끝까지 읽어야 할 것 같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으면, 내가 무언가를 놓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LA의 미술관을 좋아하게 된 건 미술을 더 많이 알게 된 뒤가 아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에 놓인 의자, 정원에서 들리는 물소리, 작품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처럼 미술이 아닌 것들까지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LA에는 작품만 보고 돌아오기엔 아까운 미술관이 많다. 건축을 보러 가도 좋고, 정원을 걷거나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다 와도 괜찮다. 때로는 마음에 드는 작품 한 점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서 소개한 LA에서 꼭 가봐야 할 미술관 6곳을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걸어보았다.
1. 게티 센터에서는 작품보다 먼저 빛을 본다
게티 센터에 도착하는 과정부터 이미 하나의 장면 같다.
언덕 아래에서 트램을 타고 천천히 올라가면 복잡한 도로와 도시가 점점 멀어진다. 트램에서 내린 뒤에는 서둘러 전시장으로 들어가기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편이 좋다. 밝은 트래버틴 벽과 건물 사이로 떨어지는 그림자, 계단 끝에서 갑자기 펼쳐지는 LA의 풍경이 이곳의 첫 번째 전시처럼 느껴진다.
게티 센터는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미술뿐 아니라 현대 건축과 정원을 함께 경험하도록 구성된 공간이다. 공식 방문 안내에도 미술, 건축, 정원을 주요 볼거리로 소개하고 있다.
전시를 보다가 집중력이 흐려지면 밖으로 나와도 된다. 센트럴 가든으로 내려가 물길을 따라 걷고, 벤치에 앉아 햇빛이 건물의 색을 어떻게 바꾸는지 바라본다. 그러다 다시 마음이 움직이면 다른 전시장으로 들어간다.
게티 센터에서는 모든 작품을 빠짐없이 보는 것보다 안과 밖을 오가는 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2. 게티 빌라에서는 다른 시대에 들어가 본다
게티 빌라는 작품을 ‘관람한다’기보다 한 시대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에 가깝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긴 회랑, 정교하게 다듬어진 정원, 햇빛을 반사하는 연못을 걷다 보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은 유리 진열장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물과 정원, 바람과 바다 냄새가 함께 그 시대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곳은 고대 로마의 해안 별장을 재현한 공간에 그리스·로마 유물을 전시한다. 가장 큰 정원인 아우터 페리스타일에는 반사 연못과 열주식 회랑이 있고, 태평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작품의 제작 연도와 신화 속 인물을 모두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조각상의 옷자락이 어떻게 돌로 표현됐는지,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쉬고 대화했을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게티 빌라에서는 지식을 확인하기보다 시간의 감각을 바꿔본다.
3. 더 브로드에서는 사람들이 무엇 앞에 멈추는지 본다
더 브로드는 조용히 혼자 감상하는 미술관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넓은 전시장에 들어서면 강렬한 색과 익숙한 이미지, 큰 스케일의 작품들이 한꺼번에 시선을 끈다. 작품을 촬영하는 사람, 멀리 떨어져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 아이에게 자기 방식으로 설명해주는 사람까지 관람객들의 반응도 전시의 일부처럼 보인다.
더 브로드는 2,000점 이상의 전후·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건물은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가 설계한 ‘베일과 볼트’ 구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작품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내 눈이 어디에서 멈추는지 살펴본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작품이 반드시 나에게도 가장 좋은 작품일 필요는 없다. 반대로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작품이 이상하게 계속 생각날 때도 있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더 브로드를 즐기는 재미다.
4. LACMA에서는 전시장 밖의 예술을 본다
LACMA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Urban Light가 생각난다.
도시 곳곳에서 사용되던 주철 가로등 202개를 모아 만든 크리스 버든의 작품이다. 반듯한 격자처럼 보이지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가로등이 서로 다른 각도와 배열을 만든다.
낮에는 가로등 사이로 사람과 도시가 보이고, 해가 지면 불빛 사이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작품에 더해진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기둥에 기대 쉬고, 아이들은 가로등 사이를 뛰어다닌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예술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Urban Light는 무척 LA다운 작품이다.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고, 작품이 도시의 배경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다시 주인공이 된다.
LACMA에서는 ‘관람’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작품 속을 걸어본다.
5. MOCA에서는 한 작품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문다
MOCA는 더 브로드보다 차분하고 밀도 있게 느껴진다.
전시장이 상대적으로 아담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모든 작품을 보겠다는 마음도 내려놓기 쉽다. 작품 한 점 앞에 서서 처음 눈에 들어온 부분과 잠시 후 보이기 시작한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천천히 살펴본다.
MOCA는 1979년 설립된 작가 주도의 현대미술관으로, 약 8,000점에 이르는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국제적인 현대미술과 함께 LA 미술에 관한 깊은 소장품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이곳의 중요한 특징이다.
현대미술은 가끔 불친절하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없고, 설명을 읽어도 여전히 모호하다.
그럴 때는 이해하려는 대신 질문을 하나만 남겨본다.
‘나는 왜 이 작품이 불편할까?’
‘왜 자꾸 이 색으로 시선이 돌아갈까?’
‘이 작품을 집에 가져갈 수 있다면 어디에 두고 싶을까?’
정답이 없는 질문 하나가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만들기도 한다.
6. 헌팅턴에서는 하루의 속도를 늦춘다
헌팅턴은 한 가지 이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도서관과 미술관, 넓은 식물원이 하나의 공간 안에 있다. 회화와 장식미술을 보고 나온 뒤 장미 정원을 걷고, 다시 선인장과 다육식물 사이를 지나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모든 정원과 전시관을 하루에 다 보려고 하면 어느 순간부터 아름다운 풍경도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한 통로가 되어버린다.
그날 마음이 향하는 곳 두세 군데만 골라도 충분하다. 꽃이 많이 핀 계절에는 정원에 더 오래 머물고, 더운 날에는 전시관과 도서관 중심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헝팅턴에서는 얼마나 많이 봤는지보다 얼마나 여유롭게 머물렀는지가 그날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미술관에서 꼭 무언가를 배워오지 않아도 된다
미술관을 나올 때 작품 이름을 많이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건물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나 정원에서 맡은 풀 냄새, 유난히 마음에 들었던 의자 하나를 기억할 수도 있다. 뮤지엄 숍에서 발견한 책이나 엽서가 그날 본 작품보다 오래 남기도 한다.
감상은 시험이 아니다. 작품이 왜 중요한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해도, 그 앞에서 잠시 멈추고 싶었다면 이미 충분히 본 것이다.
LA의 미술관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붙잡는다. 게티 센터에서는 빛을 보고, 게티 빌라에서는 시간을 상상한다. 더 브로드에서는 사람들의 반응을 구경하고, LACMA에서는 작품 속을 걷는다. MOCA에서는 한 점 앞에 오래 머물고, 헌팅턴에서는 하루의 속도를 늦춘다.
처음부터 미술을 좋아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을 둘러싼 공간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먼저 좋아하다 보니, 어느 순간 미술도 함께 좋아져 있었던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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